산악계 소식

아! 히말라야 (김유복 경북산악연맹 회장 경북일보 기고문)

작성자 정보

  • 경북연맹 작성 348 조회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아! 히말라야

김유복.jpg

▶ 김유복 경북산악연맹 회장

지난 13일 오전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네팔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군에 있는 구르자히말(7193m) 남벽 등정 도중 베이스캠프(3500m)에 닥친 산사태와 돌풍으로 베이스캠프와 함께 휩쓸린 김창호 원정대장을 포함한 한국인 5명과 네팔인 4명 등 9명이 희생당한 사고가 있었다는 참담한 소식을 접했다.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히말라야에는 끊임없는 인간의 도전과 좌절이 반복되는 기구한 역사가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이 나의 길’이라며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자 한 진정한 산악인 김창호 대장이 이끈 ‘코리안웨이 원정대’가 사고를 당했다. 김 대장은 우리 산악계에서는 보석 같은 존재다.

세계 8000m급 14좌를 무산소로 최단기간에 달성한 철인이었지만 쉼 없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위대한 모험가이기도 했다. 그가 지금껏 걸어온 인간한계의 도전에는 숱한 난관이 있었지만 늘 한국인의 힘과 의지를 내세워 세계인에게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었다. 산악인이라면 히말라야를 동경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필자도 몇 차례 히말라야를 다녀 온 경험이 있지만 ‘신(神)의 고향(故鄕)’히말라야는 아무나 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절감할 때가 있다.

세계 유명 산악인들이 히말라야를 오르고자 숱한 노력과 도전을 하지만 신(神)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체험담에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험준한 히말라야 거벽을 오르고자 하는 젊은 산악인들에게는 그것이 곧 인생의 전부일 수가 있다.

필자가 산악 관련 일에 반평생을 바치고 있지만 그 어떤 해외원정대에게도 잊지 않고 간곡히 당부하는 게 있었다. “살아 돌아오라”는 말이었다. 이번에 히말라야에 묻힌 김창호 대장의 부르짖음에도 이런 것이 있다. “From Home To Home(집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원정의 완성)” 이라고 강조했던 그가 결국 세 살짜리 딸(단아)과 사랑하는 아내를 집에 두고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만 슬픈 역사를 또 만들었다.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다.

이번 사고로 숨진 대원중에 경북·대구 출신이 셋이나 있어 더욱 안타까움이 앞선다. 김창호 대장이 예천 출신으로 영주 제일고를 졸업하였고 유영직 대원은 고향이 풍양으로 대구에서 살며 목공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팔순 노모님과 함께 사는 효성 지극한 산악인이었고 한국산악회 정준모 이사는 포항철강공단에서 유망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인으로서 김 대장과 함께 산악다큐를 찍는 임일진 감독을 후원하는 영남대 산악부 출신 산악인이라 우리 지역의 산사람으로 아까운 인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또한 함께 희생된 네팔인 중에 우리 경북산악연맹과 인연이 있었던 젊은이도 있다. 쿡(Cook·요리사)으로 따라간 ‘치링 보떼(Chhiring Bhote)’가 지난 2016년 경북산악연맹 K2 원정대의 쿡으로 함께 했던 사람이라 더욱 애석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알피니스트를 지향하며 ‘등정주의’(이미 개척된 루트를 따라 오르는)가 아닌 ‘등로주의’(새로운 루터를 개척하며 오르는) 대표 주자였던 김 대장이 인도 뱅골만(해발 0m)에서 카약을 타고 시작하여 1000㎞의 자전거 라이딩과 도보로 베이스캠프 도착 후 에베레스트 정상(8848m)까지 무산소로 오른 전설적인 ‘From 0 To 8848’이 “신(神)과 공정한 게임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유명한 어록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신(神)이 그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얼마 전 안동에서 만난 김 대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구르자히말 품에 안긴 희생자들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히말라야의 신이시여! 모두에게 영면의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알림 0